2013년 12월이었다. 차가운 타일 바닥에는 베개보다 조금 더 큰 박스가 깔려 있었고, 거기는 내가 밤새 누웠던 곳이다. 눈을 떠보니 빛이 두 눈을 환하게 비췄고 잠잠한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스치는 새벽이었다. 그날은 C국에서 추방된 지 4개월이 지난, 한국을 떠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. 나에겐 가장 설레고 가슴 떨렸던 그 어떤 찬란한 레드카펫보다 더 멋진 바닥에서 보냈던 짜릿한 밤이었다.
2013년 여름, ㅈ일ㅇ배를 드리는 중 C국 경찰들이 ㅇ배 현장을 덮치는 바람에 내가 태어났던, 부모님의 청춘을 다 바친 C국을 떠나야만 했다.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, 나의 조국이지만 너무나도 낯선 땅인 한국에 도착했다. 도착하고 보니 나는 C국에서는 한국인이었고 한국에서는 그저 한국어를 능통하게 하는 C국인이었다. 한국생활 4개월은 나에게 길고 긴 4년 같았다. 한국에는 간단하게 밥 한 끼 같이 먹어줄 친구도 없었고, 뭐 하냐고 문자 한 통 남길 수 있는 친구도 없었다. 그렇게 난 늦은 아침, 남들이 예쁘게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2교시 수업 종을 들을 때쯤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대충 세수만 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도서관으로 향했다. 매일 같은 일상이었지만, 조금씩은 괜찮아지는 것 같았고 ㄱ회 친구들도 차츰차츰 알아가며 한국생활에 조금씩 괜스레 적응하는 것 같았다. 그렇게 평온한 날들을 쫓아 열심히 살아가는 나에게 내 평온을 질투하듯 아버지께서는 새로운 ㅅ교지를 찾기 위해 갑자기 동남아 탐방을 떠나셨고, 1개월의 탐방의 결과는 12월에 Ca국으로 떠나는 것이었다. ‘한국에 겨우 적응하고 있는데 또 새로운 곳이라니….’ 두려움이 앞을 가렸지만, 현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. 떠날 준비를 다 마치고 한국에서의 마지막 가정ㅇ배 때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을 나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. 아버지께서는 50세의 나이에 다시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길게는 40년은 더 살 수 있으니 인생의 제2막을 새롭게 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고 하셨다.